본문 바로가기

HR매거진

기술 과잉의 시대, 업무 효율화부터

2020-02-28


 

 

 

유명한 도시 전설이 있다. 유럽의 한 박람회에서 나사의 기술자가 러시아 기술자에게 미국의 기술수준을 자랑했다. 심통이 난 러시아 기술자가 짓궂은 질문으로 응수했다. "당신네 미국인들은 우주에서 무엇으로 기록하시오? 무중력 상태에서는 볼펜을 쓰지 못할 텐데." 답을 하지 못한 미국인은 귀국 후에 엄청난 연구비를 받아내 수년간 연구 끝에 무중력 공간에서도 사용가능한 볼펜을 만들어냈다. 의기양양해진 미국인이 러시아인에게 우주펜을 자랑했다. "당신들에겐 이런 펜이 있소? 우리는 지난 수년간 연구 끝에 우주에서 쓸 수 있는 펜을 만들어냈지!" 러시아인이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요? 우리는 연필 쓰는데." 


기술 과잉의 시대
우리 주변에 기술과잉이 심하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로봇을 만들어 시키고, 아날로그 방식으로도 가능한 활동을 디지털 기술로 구현한다. 기술 도입은 대부분 편하고 유용한 변화지만 가끔 불편한 변화를 만들기도 한다. 얼마 전에 필자가 햄버거를 사먹으러 매장에 들어갔다.

 

'키오스크로 주문하세요'라는 안내문을 따라 집에 있는 TV보다도 큰 모니터 앞에 섰다. 몇 번 버튼을 누르는 동안 필자 뒤에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이게 아니다 싶어 음식 하나를 취소했더니 키오스크가 크게 외쳤다. "주문을 취소하셨습니다." 성마른 사람들의 화살 같은 시선이 등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기술 플렉스?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우리가 이 정도로 하이테크 기업입니다'라고 자랑하는 것 같다. 정작 사용자는 불편한데도 말이다.

기업들이 비용절감 차원에서 기술을 도입하는 것을 비난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컨설턴트의 구슬림에 넘어간 거라면 기업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컨설턴트들은 종종 멋진 슬라이드 화면 앞에서 현란한 IT용어를 구사하며 기업 담당자의 혼을 빼놓는다. 고객은 큰 돈을 약속하고 프로젝트는 고객사를 기술적으로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에 올려놓는다. 그 수준이 어찌나 높은지 직원들은 새로 도입된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일하는 방법을 찾아내기에 급급해진다. 가끔은 컨설턴트들의 현란한 프레젠테이션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수를 만나기도 한다. 전직 컨설턴트 출신의 기업 내 담당자다. "선수들끼리 만났으니 약은 그만 치시고요. 우리 요구사항대로 시스템을 만들어주세요." 컨설턴트들은 이런 고객을 싫어한다. 정말로 싫어한다. 필자도 그랬다.

현명한 기업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한국야쿠르트는 참으로 신기한 기업이다. 제품을 파는 방식이 구식이어도 이런 구식이 없다. 직원이 전동카트를 타고 고객을 찾아가 물건을 건네준다. 디지털 만능시대에 이게 웬 구석기시대 방식인가.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계산대 없는 무인매장의 인공지능 시스템이 고객의 쇼핑 과정을 관찰하고 비접촉 방식으로 결제까지 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전동카트로 제품을 운반한다니. 그런데 이상하다. 부침이 있다지만 전반적으로 한국야쿠르트는 계속 성장하는 모양새다. 매출도 꾸준히 늘어 1조원을 넘어섰다. 비결이 뭘까?

한국야쿠르트는 경쟁사가 흉내도 못 낼 핵심역량을 가지고 있다. 속칭 '야쿠르트 아줌마'로 불리는 영업사원들이 만들어내는 면대면 유통채널이다. '프레시 매니저Fresh Manager'로 이름을 바꾼 이들은 매일 아침 도심을 누비며 고객을 찾아간다. 누군들 미소 띤 얼굴로 건강식을 배달하는 프레시 매니저를 싫어할 수 있을까? 여혐사회 속에서 잔뜩 움츠러든 1인 가구 여성들도 프레시 매니저에게는 두려움 없이 문을 연다. 그러면서 마음의 문까지 열고, 프레시 매니저가 추천하는 다른 제품도 추가로 구매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간편식 제조업체와 육류업체들이 한국야쿠르트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있다. 자신들의 제품을 배달해 달라고 말이다. 한국야쿠르트는 어떻게 유통기한이 짧은 음식을 전국 곳곳에 제시간에 배달할 수 있는 걸까? 그들은 제품 생산부터 배달까지 전 과정을 디지털로 관리하면서도 정작 디지털을 말하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한국야쿠르트의 성공비결이다.

일상 속 기술은 편리한 기술과 불편한 기술로 나뉠 수 있다. 편리한 기술은 일상 곳곳에 있지만 종종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기술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 기술이 작동을 멈추기 전까지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세 살 난 아기는 전기공학을 모르지만 매일 화장실 전등을 켠다. 편리한 전기 기술이 일상 안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공인인증서와 액티브엑스로 대표되는 불편한 기술도 있다. 시중 은행들은 보안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고 기술 탓을 해왔다. 기술의 방패 뒤에 숨어있던 은행들의 비겁함은 카카오뱅크가 출현하면서 만천하에 드러났다.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카카오뱅크로 이동했다. 불편한 기술은 고객의 외면을 받는다. 편리한 기술은 고객을 끌어 모은다. 당연히 필자도 주거래은행을 카카오뱅크로 바꿨다.

아웃풋을 늘리는 데서 시작하는 업무 효율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고려하는 기업은 기술 과잉의 유혹과 불편한 기술의 오류를 피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업무 효율화부터 시작하자. 52시간 근무제 시작 이후 여러 기업들이 필자에게 워크숍 진행을 요청했다. 이른바 '워크 다이어트'를 하고 싶다는 거다. 그런데 하나같이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업무를 줄일 생각부터 한다. 그러니 되는 일이 없지. 필자는 먼저 사업본부, 팀 단위에서 현재 업무를 활동 단위에서 분석하라고 권한다. 반드시 해야 할 활동과 하지 않아도 되는 활동, 없애면 좋은 활동을 구분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없애면 좋은 활동은 그다지 많이 드러나지 않는다. 누군들 자신이 불필요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인정하겠는가. 그래서 모두들 자기 일은 중요하다고 말하고 그래서 줄일 것도 별로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모두들 비효율을 지적하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된다. 회사에 유령이 나타나서 업무를 방해하기라도 하는 걸까?

업무 분석을 끝낸 후, 사람들은 고객가치를 높이기 위해 늘릴 활동을 찾아낸다. 업무 효율화라면 의례 인풋을 줄이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때 필자에게 항의도 한다. "교수님, 이러면 일이 늘어나지 않나요?" 한국야쿠르트가 뛰어난 점은 면대면 영업활동을 늘리기로 결정한 후 거기에 디지털 역량을 집중한 데에 있다. 필자는 우수사례를 소개하면서 업무 효율화는 아웃풋을 늘리는 작업부터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못 이기는 척하며 고객가치 증대를 위해 늘려나갈 업무활동을 찾기 시작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꺼내놓고 설명회와 투표를 통해 단위조직별로 최대 2개까지 추가할 업무활동을 정한다. 필자는 내친 김에 선정한 업무를 세분화하고 담당자까지 정하라고 요구한다. 추가업무를 원하는 사람은 없기에 워크숍은 생기를 잃고 자연스레 중간휴식 시간이 시작된다.

휴식 시간 후 사람들의 태도가 바뀐다. 추가업무의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제 업무 간소화에 열심을 보인다. 자칫하면 업무가 추가된 채로 워크숍이 끝날 것 같기 때문이다. 없애면 좋은 활동은 물론 하지 않아도 되는 활동까지, 이제부터는 어느 것도 숙청의 칼을 피할 수 없다. 주간업무보고는 오프라인 회의에서 이메일로 바뀌고 이메일은 종종 클라우드 공간에 자료를 업로드 하는 것으로 대체된다. 유사자료를 표준화해서 중복작업을 없애자는 의견부터 이메일에 '안녕하십니까?'로 시작하는 인사말을 없애자는 시시콜콜한 의견까지 갖가지 아이디어가 속출한다. 아웃풋 늘리기를 먼저 해야만 인풋 줄이기도 제대로 진행된다는 사실은 올해 70여 차례 워크숍 진행을 통해 거듭 확인된 바 있다. 그래서 업무 효율화는 워크 다이어트와 동일어가 아니다. 혹시라도 누가 그렇게 말한다면 정중하게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 게 좋다. 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 말이다.

업무 효율화가 먼저, 디지털 도입은 그 다음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서 업무 효율화와 기술도입은 자전거의 앞바퀴와 뒷바퀴의 관계를 가진다. 기술도입은 분명히 기업의 업무속도를 높일 것이다. 하지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구분을 제대로 하지 않는 기업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력 질주를 하는 자전거와 다를 바 없다. 기술이 곧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숙한 사람의 손에 들린 날 선 칼은 자해도구가 되기 쉽다. 이미 우리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스마트폰을 사용한 이후로 폰만 스마트해지고 사용자는 오히려 퇴보하는 경험 말이다.

혹자는 필자가 디지털 기술 도입에 대해 저항하는 반동적인 사람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다. 의혹을 덜어내고자 밝히자면 필자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10년 간 경영컨설팅을 했다. 최근 10여 년 간 기업에서 업무효율화, 성과관리, 창의적 조직문화 도입 등을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주제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 기술로 IT제국을 건설한 구글, 페이스북 등은 수평지향적이고 창의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디지털은 젊은 세대의 기술, 젊은 세대는 수평지향적, 수평지향적 기업은 창의적 기업이라는 등식이 떠오르기 십상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와 다르다.

많은 스타트업은 진입장벽이 낮고 시장 파괴력이 큰 디지털 기술을 핵심역량으로 여긴다. 당장 성과를 내지 못하면 문을 닫을 절박한 상황이기에 스타트업은 허례허식과 의전을 걷어내고 성과창출에 몰입하는 문화를 선호한다. 업무를 지연시키는 위계조직도 정보를 왜곡하는 수직적 조직문화도 외면 받는다. 청바지를 입고 출근하기에 창의적 성과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일이 절박하기 때문에 무슨 옷을 입는지 서로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조직에서 디지털 기술은 성과를 배가시킨다. 하지만 성과보다 상사의 기분 맞추기를 중요시하는 조직에서 디지털 기술은 의전을 배가시킨다. 실제로 필자는 이메일 수신자를 직급대로 적지 않았다고 직원을 꾸중하는 상사가 존재하는 조직에서 강의를 해본 적이 있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조직에게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그저 큰 돈 쓰기 좋은 명분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도시 전설의 진실을 밝힌다. 나사는 우주펜 개발을 주도하지 않았다. 미국의 발명가 폴 피셔가 기체를 충전한 카트리지가 잉크를 밀어내는 방식의 볼펜을 개발했고 이를 나사에 납품했다. 엄격한 시험을 통해 볼펜의 성능을 확신한 나사는 이른바 '우주펜'을 채택했고 미국은 물론 러시아 우주인도 이 펜을 사용했다. 우주선에서는 연필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것은 미세한 양의 흑연이라도 무중력공간을 떠돌다가 기계부품에 붙어서 전기사고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흑연은 대표적인 전기도체다. 설사 우주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지라도 그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기술을 감당할 능력과 지혜가 부족한 이에게 기술은 비싸고 멋진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메시지 말이다.


김용성 피플앤비즈니스 교수


본 기사는 HR Insight 2020. 01월호의 내용입니다.

HR Insight의 더 많은 기사를 보고 싶다면 아래 홈페이지를 방문해주세요.

www.hrinsight.co.kr 


 

키워드